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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04 성경적 경건
  2. 2010.06.01 슬프도소이다

성경적 경건

Faith 2010. 6. 4. 13:58

 

성경이 말씀하시는 경건이란 어떤 것일까요? 경건이란 단어는 ‘거룩한 삶,’ ‘온전한 예배’, 그리고 ‘건강한 영성’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경건하다는 것을 영혼이나 정신적 영역에 속한 종교적 활동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경건은 예배, 기도, 찬송과 같은 신앙의 행동에 국한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 ‘경건’은 일상 현실과 구분된 종교적 활동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일상활동과 교회활동을 하나로 통합하고,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을 하나로 묶어내고, 주일과 주중을 연속성 속에 두면서 하나님 말씀의 끈으로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로 묶고 통합하는 전인적 삶이 곧 성경이 말씀하시는 경건입니다.

 

 

 

경건을 종교적 세계로 도피하거나 몰입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성경적 경건은 일상적 삶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평범한 삶의 의미를 재조명해 내고, 삶을 바르게 변화시켜 나가는 실천적 삶입니다. 그래서 가장 경건한 삶은 가장 실제적인 삶이고, 단순히 정신적 활동만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가장 구체적인 실천의 삶입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건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그에게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분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과 실천이 삶 속에서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신앙고백도 이런 통합된 삶을 요청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자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복종하며 따라야 한다는 것을 고백하게 합니다. 믿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도록 하나로 합쳐 있습니다. 그래서 브루스 다마레스트 교수도 “성경적 경건은 정교, 정감, 정행의 통합”이라고 했습니다. 바른 가르침인 정교 (Orthodoxy), 바른 감정인 정감(Orthopathy), 바른 실천인 정행 (Orthopraxis)이 말씀 안에서 통합되는 건강한 삶을 곧 참된 경건으로 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철저히 믿는 것처럼 보이는 종교적 근본주의나, 바른 교리만 강조하는 메마른 정통주의나, 뜨거운 열광주의를 성경적 경건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성경적 경건은 “진정한, 성찰된, 의식있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이런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입니다. 경건은 통합된 삶이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경건을 말할 때 단순히 기도, 성경읽기, 교회출석을 말하지 않고 (물론 이것은 필요하고 경건의 기초가 됩니다만), 그 말씀을 적용하면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을 떠난 경건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참된 경건의 모습을 되찾을 때입니다.

 

http://www.sydc.net/mboard/mboard.asp?exe=view&csno=&board_id=column&group_name=church&idx_num=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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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소이다  (0) 2010.06.01
Posted by silve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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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소이다

Faith 2010. 6. 1. 09:48

"슬프도소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니이다" ( 32:17)

   

예레미야 32장의 시대적 배경은 시드기야왕 11(1)이다. 시드기야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이며 11년은 그가 다스린 마지막 해이다. 이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패망이 임박한 상태이다. 그런데 시위대 뜰에 갇혀있는 예레미야에게 때에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사촌이 팔려하는 고향의 밭을 사라하시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은을 달아주고 밭을 사는 것을 기록하고 있따.

   

이런 때에 밭을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밭을 사서 매매 증서를 토기에 담아 여러 동안 보관하라 하시며 그것으로 회복에 대한 표징을 삼으시는 것이다.

"사람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15)

   

하나님의 명대로 밭을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아뢰는 내용이 17절에서 25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 여호와여 주께서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니이다"

멋진 믿음의 고백이다. 그런데 고백에 앞서서 예레미야는 "슬프도소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신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며 예레미야는 무엇이 슬프다는 것일까?

   

그의 고백을 계속 읽어보면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는 만군의 하나님께서 출애굽하게 하신 것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회상하며 그들이 불순종하였기에 이런 재앙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의 형편은 바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대로 형벌이 임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18-24). 그러면서 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바 되었나이다"

   

말하자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능치 못하실 것이 없는 능력은 알고 있으나 현재의 갈대아인에게 망할 밖에 없는 상황을 보며 낙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 회복하실 것에 대한 증인임을 알지만 낙망의 슬픔을 감출 없이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회복하실 것이지만 때까지 겪어야 모든 상황 앞에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며 참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이런 슬픔의 한탄에 답하시며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 벌하셔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 삼고 있는 우상숭배 때문인 것을 다시금 말씀해 주신다(28-35). 발하시는 이유만이 아니라 벌의 결과와 목적을 말씀하신다(36-44). 벌의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것이며 그래서 땅에서 다시 살게 것이다. 그리고 벌의 목적은 복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백성에게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41)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70 만에 포로를 회복하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으며 회복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드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루실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또한 예레미야의 실망과 낙망의 슬픔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을 알고, 하나님이 하실 것도 알고 있지만 말씀과 약속과는 정반대로 펼쳐지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이 있기 전에 상황은 나빠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닥치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낙담하며 낙심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상 믿지 못하는 자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포기하고 실패자같이 살아가곤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얼마동안은 참으로 믿고 기다렸지만 기대하는 일이 더디게 모든 것이 헛된 같이 느껴지며 모든 일을 반드시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나의 삶에는 결코 그런 일을 행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절망감이 찾아드는 것을 아마도 이해할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런 예레미야의 한탄과 하나님의 대답을 보며 가지 교훈에 대해 생각해 보며 특별히 소망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자 한다.

1) 번째로 우리는 실망하고 절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를 때에 선지자로 사용하신 것은 예레미야가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이나 절망을 느끼지 않는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닌 것을 보게 된다. "눈물의 선지자"라는 이름을 갖을 만큼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상황과 아픔 때문에 자주 불평의 호소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12:1-4; 15:10; 15:15-18; 20:2-8; 20:14-18). 그는 하나님을 속이는 냇물같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불평하고 한탄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이렇게 실망하고 낙망하여 하나님께 호소하고 한탄하며 절망까지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이런 불평과 절망의 말들을 그분의 가운데도 삭제하지 않으시고 기록해 두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종종 예레미야를 가볍게 꾸짖기는 하시지만(12:5; 15:) 결코 크게 꾸짖으시거나 그것으로 그에게 맡기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신 것을 필요가 있다. 만약 세상에서 누구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는데 이렇게 낙심하고 불평한다면 당장 해고감이 아닐까? 번은 기회를 주겠지만 예레미야와 같이 이제 선지자 경력 60년에 가까운 사람으로 여전히 "슬프도소이다"라고 낙심하며 한탄한다면 세상은 그런 사람을 참아낼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예레미야를 견디고 계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택하셨지만 그저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것은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누구인가가 필요하셨다면 천사를 보내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예레미야가 실망하고 절망하는 약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은 그분의 인내와 성실하심으로 그를 거듭 거듭 일으키셔서 소망의 사람을 만들고 계신 것이다.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끊임없는 경고의 메시지이지만 그분의 목적은 돌이켜 복을 주기 원하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는 실망과 낙심을 알지만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소망의 사람이 필요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의 실망을 용납하시고 이해하신다. 믿음 없음을 가볍게 꾸짖기는 하셔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실망하고 어떤 때는 절망하기까지 하는 약한 자이기에 우리를 선택하여 사용하시는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실망과 절망이 가득하다. 이런 세상에 소망을 알리시기 위해서는 낙심과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소망의 사람으로 변하게 하신 사람들이 필요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망을 어떻게 해결하는 지를 필요가 있다. 번째 교훈은 바로 그것에 대한 것이다.

   

2) 우리의 실망과 낙심을 해결하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하라 하신대로 순종하여 은을 주고 밭을 사고 뒤에, 자기의 낙심을 하나님께 호소하며 "슬프도소이다"라고 한탄한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실망과 슬픔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배웠기 때문임을 있다. 그는 하나님께 호소할 마다 위로하시고 힘을 주셔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것을 평생을 통해 배워온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 중에서 예레미야만큼 개인적인 삶이 드러나 있는 선지자는 없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그는 평생을 통하여 많은 거절과 오해와 미움을 받으며 실망과 낙심과 슬픔에 호소를 하게 된다. 아니라 오늘 본문과 같이 자기를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없이 많은 경고를 무시하고 결국은 멸망당하고 포로가 밖에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실망과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할 어떤 사람도 상황도 없는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이 그를 일으키시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가장 뛰어난 훌륭함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울며 불평하고 하나님께 아픔을 호소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할 있다. 그는 매일 저녁 벼갯닛을 적셨을 다윗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다윗의 여러 시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절규하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한다. 적을 잔인하게 처벌하시라는 탄원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은 언제나 힘찬 모습으로 일어나 드리는 믿음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자에게 반드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가!

   

세상에는 실망을 해결하지 못하여 소망을 보지 못하고 절망과 우울 속에 살거나 또는 고통을 잊고자 알코올과 마약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소망을 알지 못하는 마지 못해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다가오는 상황에 대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반응할 밖에 없는 많을 성도들이 있다. 특별히 많은 젊은이들은 교회와 크리스쳔들에게 실망하여 하나님까지도 등지고 세상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낙심과 실망이 만연한 때에 하나님을 아는 당신의 백성들이 소망의 사람들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마지막 교훈으로 이것을 보고자 한다.

   

3) 하나님은 실망을 해결한 사람을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은 어쩌면 누구보다도 쉽게 불평하고 낙심과 낙망에 빠지며 슬퍼하는 예레미야에게 가장 소망의 메시지를 맡기시고 소망을 주는 자로 삼으셨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그의 메시지를 들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망을 새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 사람에게도 소망의 메시지를 맡기시기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 역시 가운데 낙심하고 낙담할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실망을 해결해 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해 보았기에 일어날 있는 일이다.

   

"소망"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이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있겠다. 구체적으로 소망에 대해 말하자면:

(1) 소망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것에서 나온다.

예레미야 애가 3장을 보면 예레미야는 여전히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말한다(19, 20).

"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되오나..."

자신의 상황을 보니 낙심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낙심에 빠지는 이유는 상황을 주시하기 때문이며 상황을 계속 주목하기 시작하면 헤어나올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밖에 없는 것이 땅의 삶이다.

   

그러나 소망의 사람 예레미야는 상황을 주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렇게 고백한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1-23)

,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회상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분의 자비와 긍휼, 성실을 기억하고 믿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에 "오히려 소망이 있다" 말하는데 이것 역시 당연한 것임을 생각할 있다. 소망이신 하나님을 주시하여 바라본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갖을 있기 때문이다.

   

(2) 소망은 믿는 것을 기대함으로 기다리기로 작정하는 것이며 믿는 것을 끝까지 기다릴 있는 힘이다.

"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선을 베푸시는도다" (24,25)

모든 상황과 모든 일을 통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기다리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소망의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일을 이루실 것을 믿으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결코 세상이 감당치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믿고 기다리는 사람을 세상은, 사단은 어떻게 방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소망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1) 항상 기뻐할 있는 것이다.

결코 돈이 많다고, 잘나고 유명하다고, 지식이 많다고, 모든 것이 있다고 항상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있는 것으로 인해 염려하고, 겉으로만 화려하고, 아는 것이 너무 많아 고민이 많은 사람들이기가 쉽다.

   

그러나 자비하시고 긍휼하시며 성실하시고 전능하신 , 그리고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소망이 있는 자는 참으로 기뻐하되 항상 기뻐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좋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힘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소망의 사람들의 특징이다.

   

(2) 언제든 든든히 서있는 자이다.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6:19)

소망이 있는 것은 배가 닻에 매여 있는 것과 같다. 바람이 불어 물결이 출렁이며 잠시 요동하기는 해도 결코 자리를 떠나지 않는 같이 소망이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항구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 든든히 서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소망의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 전쟁과 질병, 경제파탄, 가정의 파괴, 자살, 이상기후... 뉴스가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망과 낙심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이 오히려 하나님의 왕국의 기회인 것으 생각할 있는 것이다. 위기는 위험하지만 기회가 되는 것이다. 다가오는 위험 가운데 하나님의 좋은 , 그분 자신을 경험할 기회가 되는 것이다.

   

요즈음 가장 공통적인 어려움은 경제상태이다. 경제 불안정이 세계를 휘어잡고 사람들을 움츠려지게하고 있는 것이다. 때에 우리는 참으로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것을 생각하게 된다. 먼저는 우리의 문제 (경제의 불안이든 아니면 다른 문제이든 -자녀/건강) 가운데 있는 불평과 낙심과 실망을 주님께 가져가 해결 받는 것을 배워야 것이다. 주님의 격려와 약속 가운데 소망의 사람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 소망의 메시지를 가정과 직장과 교회 가운데 가져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모든 일들이 좋은 일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격려하며 하나님을 있도록 말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안의 소망의 기쁨과 든든히 있는 모습으로 인해 소망이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안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put your hope in God)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5

   

   

   

   

원본 위치 <http://www.tentmakersministry.org/bbs/board.php?bo_table=m51&wr_id=100&sfl=&stx=&sst=wr_datetime&sod=desc&sop=and&page=3>

   

예레미아 읽다가 잘 모르겠는 구절 검색하다가 걸린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세상에는 멋진 설교자도 많다. 주변에 없어서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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